
당신이 가진 수많은 love fantasy 중에서 혹시 "그림 그리는 사람과의 연애" 라는 항목은 없는가?
10명이면 7명정도의 비율로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As good as it gets의 장면처럼 "욕조에 물을 받고 있던 나의 뒷모습을 보고 잃어버렸던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 손이 멋대로 움직이며 밤새 그림을 그리고 나는 부끄럽지만 살며시 타월을 내렸다" 라거나, "나는 그의 뮤즈였다, 나와 헤어지고 그는 그림 한장 그릴 수 없었지!" 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용한 카페에 마주앉은 사랑하는 사람이 슥슥 냅킨 한 장에 그려준 그림 한 장이란 영화 같기만 하다. (클리셰해도 상관없어, 연애는 그런 거야) 나도 모르는 내 얼굴을 담은 그림이라던가, 매일 다른 모습이 담긴 사진같은 선물은 그런 연애를 꿈꾸게 만드는 주범이 아닐까싶다. 아, 포토그래퍼와 사귀어보고 싶다는 경우도 꽤 많던데. 딴 소린데, 이상하게 나는 뮤지션이 별로더라. 뮤지션은 뭐랄까, 가까이 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아임쏘리-)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이런 화가/사진작가와의 연애를 꿈꾸는 이유에 대해서 제목이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영화에서는 답변으로 "화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봐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라고 했었다. (영국영화 "캐쉬백"일 거라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감사) 뭔가 그럴듯하고 있어보이는 대답이로군. 기억해놨다가 써먹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들었던 대사.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간에, 나도 나의 fantasy list 에 저 항목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어릴 때였지. 하지만 드림컴즈트루. 드디어 나도 미대를 졸업한 지금의 내 애인을 만나서 1년 반째 연애중이다. 그동안 내내 로맨틱한 그림 선물 한장을 은근히 + 노골적으로 바라고 있었지.
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 즈음, 우리는 감독-(AE에서 갓 옮긴 초보)PD의 관계였는데, 어느날 편집실 책상 위에 붙어있던 "x감독님, 이xx피디님(나) 전화" 라고 쓰여진 포스트 잇 위에 오빠가 슥슥 어떤 여자의 그림을 낙서처럼 그려 놓았다. 머리 스타일을 보건데 그건 의심의 여지없이 나였지. 그때 난 이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연애를 하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 연애는 하게 되었건만, 오빠는 기억도 못하는 그 그림을 마지막으로 1년 반이 지나도 그림 선물 따위는 없다. 그때 그 포스트잇이나마 챙겨놓을걸. 한 장만 그려봐, 그 비싼 카메라들 어디다 쓸껀데, 나 좀 찍어줘, 감독에 미대생이었으면서 어떻게 여자친구 한장 안 그리고 안 찍어주는거야- 라고 지난 1년을 투덜거려보았지만 소용없었고 어느새 나도 포기하고 말았다는 김빠지는 이야기.
그래서 이제 막 30살이 된 현명한 여성 연애인(연예인이 아니라)인 나는 원하는 게 있으면 맘 편하게 스스로 직접 하는 편을 선택하기로 했다. 30이 되서야 그 편이 훨씬 현명하고 맘 편하고 여러모로 좋다는 걸 알았지. 그림이 갖고 싶으면 능력껏 내가 그리고, 술마시고 싶은데 약 때문에 같이 안 마셔주면 집 앞 와인샵에서 한 병 사다가 혼자 홀짝 마시면 되고, 뭐가 먹고 싶은데 바빠서 시간이 안 되면 내가 해 먹으면 되는 심플하고 만족스러운 해결책. 게다가 그러다보면 그림도 늘고, 와인(술)도 늘고, 요리솜씨도 늘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무럭무럭 난 또 자라나는 거야.
김태희의 똑똑한 카드생활보다 훨씬 더 낫고 유용한
30세 여자의 지혜로운 연애생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