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서울 벗어나기

약속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겨버리고 아슬아슬하게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새까맣게 까먹을 뻔했다, 오늘의 약속
손바느질을 배울 수 있는 하얗고 나즈막한 카페에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일행들과 길로 나온다.
쭉 뚫린 숲길과 구불구불 골목길 중 골목길쪽을 선택한다.
한 시간만 늦어도 이 집 떡은 구경도 못한다는 오래되고 인기만점의 방앗간을 지나면서 난 저기 떡 먹어보았다는 동네 주민의 자랑을 부러워한다. 부러워할 건 이것뿐이 아니지. 와, 이런 집 살면 정말 좋겠다- 라며 떡의 200배쯤 되는 부러움을 탄성으로 열다섯번쯤 내뱉으면 이리로 가도 될까 싶은 샛길이 나온다. 아, 정말? 싶지만 믿음직한 동네주민 뒤를 따라 두리번두리번거리며 기어올라간다.
삐죽 나온 산 중턱의 카페 앞을 지난다.  와, 여기가 여기잖아. 하지만 거기보다는 베트남처녀와 결혼한 아저씨가 막걸리며 자판기 커피며 맥주를 파는 앞집이 더 땡긴다. 산행에는 묵에 막걸리지- 일행이 한마디.
차가 다니는 산길을 조금 걷다보면 강원도 산골짜기 펜션같이 생긴 정말 신기하고 신기한 통나무 집을 구경한다. 아, 말도 안돼 이런 풍경.
엉? 근데 언니 어디로 가는거에요? 동네주민가이드는 또 이런길로 가도 될까? 싶은 샛길로 안내한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에요- 라며.

축축한 흙냄새, 잎냄새, 나무냄새- 세상에, 너무 좋잖아.
얼마나 산길을 가야될까? 단단히 마음먹으려고 하는데 마음을 다 먹기도 전에 어느새 계곡이다. 정말 순식간이잖아. 도라에몽의 도꼬데모도아라도 열었나. 여기가 서울이라니, 믿을 수가 없구나. 바위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은 너무 맑아 온갖 것들이 다 산단다. 와, 시원해.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뛰어들고 싶지만 서울에서 볼수 없다는 여기만 산다는 그 귀하신 몸들이 다치실까봐 그러지는 못하고 소심하게 손만 찰랑찰랑 해본다. 앗, 차가.

계곡을 따라서 산을 계속 걷는다. 커다란 바위 사이로 계곡물이 콸콸 흐르고 그런 바위 위에 작지 않은 절이 버티고 있다. 저 그늘진 바위 위에 체크무늬 담요를 깔고 앉아 허공만 바라보다 와도 좋겠다.
계곡보다 더 볼 게 많은걸. 계곡을 따라 집들도 있다. 이 동네,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지만 어리둥절한 "여긴 어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 한밤중까지 나는 계속 여긴 어디? 여긴 어디? 몽롱해했었다는 것-

구불구불, 두리번두리번,
동네의 모양새에 눈이 팔려 아슬아슬하게 산을 내려오니 산보다 더 조용한 동네가 나온다. 이십년전 동네같은 조용한 동네. 작은 빌라 앞 느티나무 아래에는 파란 간의의자를 놓고 할아버지들이 한 줄로 주욱 앉아 우리들을 구경하고 계신다. 비디오 가게와 양수기, 보일러 수리를 같이 하는 재주 많은 사장님의 가게를 지난다. 동네 주민 가이드 언니는 언젠가 피자를 구워 파는 절도 본 적 있단다. 솜씨 많은 사람만 사는 동네인가봐.

와앗, 어느새 큰 길이다.
하지만 큰길마저 달라보여. 이를 어쩌나. 제대로 콩깍지가 씌였다.
다시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어 처음 시작했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산행 뒤에는 맥주 한잔과 치킨 그리고 난생 처음 먹어보는 삭힌 홍어와 두부 김치. 바삭하고 맛깔나는 후라이드치킨과 삭힌 홍어가 공존하는 맥주집이라니. 홍어를 처음 먹어본다고 꺅꺅 거리다가, 어느새 아무렇지 않게 입안으로 넣고 있는 나. 정말 겁없이 먹는다며 놀라는 일행들. 없어서 못 먹는 마음으로! 짭짤하고 톡쏘고 쫄깃한 홍어맛이 그리 나쁘지 않다. 작년에는 과메기를, 올해는 홍어를. 내 식도락라이프는 점점 완성되어 가는구나. 맥주를 다 비우고 계산을 하고 나서 이사온지 얼마 안돼 정리를 못했다며 부끄러워 하는 동네주민을 꼬셔 그 집으로 우루루 몰려간다.

까맣고 털이 긴 ㅇㄷㅋ 와 씨씨와 닮았지만 조금 더 폭신폭신하고 동글동글한 ㅅㅁㄹ가 맞아준다. 아우, 예쁜 것들. 훌륭한 집은 고양이로 완성된다니까. 꼬리를 들고 느릿느릿 하지만 가볍게 걸어다니는 고양이라 불리는 털뭉치가 있어야 진짜 집이 집이 되는거라고. 이걸 보라고, 어둑한 빨간색의 복도와 까만 고양이, 하얀 레이스 커튼이 나풀거리는 창문에 올라앉아 있는 고양이의 까만 실루엣.

풀이 무성한 뒷마당과 창고가 있는 정말 이 동네스러운 집. 나무 대문까지 완벽해. 부러워요 부러워요 부러워요 백번쯤 외치다보니 해가 지고, 해가 지자 집안에서 나와 마당에 평상을 펴고 맥주를 마신다. 밤은 늦어지고, 버스도 끊긴다. 버스가 끊어지니 차 소리 하나 없는 고요한 동네. 이렇게 조용하고 축축하고 시원한 곳이 서울이라니.

"이 동네는 기가 정말 세요.", "아 그래요? 그래도 진짜 살고 싶다." 했더니 동네주민언니는 나를 살짝 바라보더니, "걱정없겠는데요" 라고 하신다. :) 하핫, 제가 좀-

한밤중까지 맥주를 마시다가 먼저 일어나 가게 직원과 아는 사이라는 언니를 대동하고 늦게까지 오르가닉/페어트레이드 커피를 판다는 드립커피집에 잠시 들러 코스타리카와 페루 원두 두 봉지를 샀다. 같이 간 언니 덕에 솜씨 있는 바리스타가 드립한 이디오피아 한 잔을 얻어마셔 입안의 맥주기를 정리해주고는 조용하고 휑한 길을 잠시 걷는다. 택시가 없지만, 언젠가 오겠지 뭐. 알게 뭐야 싶은 느긋한 마음. 여기에 있다가는 정말 세상변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겠어요. 여름은 다 갔어요, 가을인가봐요. 지나면 다 아무것도 아닌거죠. 주절주절 낮게 속삭였는데 동네주민언니가 갑자기 나타났다. 목소리, 다 들렸어요 하하하핫. 동네가 얼마나 조용한지 몇십미터 밖에서 속삭였는데, 언니네 마당까지 다 들렸대. 잠깐 조잘조잘 다시 인사를 하다가 슉- 토토로의 고양이버스처럼 난데없이 나타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시골집에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처럼 손을 흔들고 흔들고 또 흔든다. 나무 대문  앞에서 택시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세 명의 남아있는 일행들, 마치 시골집 친구들 같잖아.

금새 시내인데도 아직도 몽롱하다.
내가 어디를 갔다 왔던가?
집에 돌아와도 정신이 들락 말락.
온종일 바닷가에서 햇볕을 쐬며 놀고 난 밤처럼 뭔가가 나를 감싸고 있는 느낌. 그 동네의 공기를 조금 지고 왔나보다.

꿈같은 하루.
공간이동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저 멀리 멀리 좋은 곳에 피서라도 갔다 온 듯한 하루.

참 좋더라.
고마워요, 언니.




 
by catail | 2008/08/04 15:30 | SMALL TALK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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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키르난 at 2008/08/04 18:14
음음... 지금 저기가 어드메일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뒤져보는데 생각나는 곳이 딱 두군데네요.+ㅅ+ 북한산 자락 아래랑 인왕산(맞을거예요;;;)자락 아래. 근데 아마도 후자일 것 같은데요. 예전에 광화문에서 버스타고 친구네집 가는 도중에 그쪽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서울맞냐고 속으로 되묻던 기억이 나서요.
Commented by catail at 2008/08/04 20:31
예리하신데요. :)
Commented by Azafran at 2008/08/04 20:19
일상 속의 비현실을 경험하고 오셨네요. 두 시간이나 늦어도 "야단을 맞았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 지인들이라니 평소에 쌓으신 덕을 짐작케 합니다. ^^
저는 고마운 언니를 두지 못한 탓인지 가까운 곳에서 좋은 계곡과 자연을 찾아내지 못하고 이번 주말에 또 지리산 자락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Commented by catail at 2008/08/04 20:31
야단맞아 마땅한데 그냥 넘어가 주시더라고요 :)
와, 지리산.
전 지리산 가본지 한 20년쯤 된 것 같아요.
아빠가 매미를 잡아줬던 기억이 마지막 지리산의 기억인듯 해요.
좋은 여행 되세요.

Commented at 2008/08/04 20: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ceias at 2008/08/04 21:06
인왕산 쪽이라고? 나 어릴 적 소풍 다니던 백모모 이야기 같은데.
나는 어렸을 때 드나들어서 별 감흥이 없는데
숲 연구소 다니는 친구는 서울 밖을 다 합해서도 첫손 꼽더라.
아, 언제 가봐야겠다.
Commented by catail at 2008/08/04 21:30
정답이다.
Commented by 위센셩 at 2008/08/04 22:50
아, 정말 멋져요- 글 만큼이나 멋진 솜씨가 녹아난 사진이라도 몇 장 함께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왕산 쪽이라면 한번 찾아보아야겠군요! ^.^
Commented by catail at 2008/08/05 00:46
아, 사진이 있는데, 귀찮아서.
내일쯤 올리도록 노력을...
Commented at 2008/08/04 23:3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죠제 at 2008/08/05 07:20
언니 바카라 게임에 도전하셔서 1억타시라는데...

난 언니가 빨리 책냈으면 좋겠어요. 대체 못하는게 뭘까
글보니 내가 다 몽롱해진다
Commented by 라엘 at 2008/08/05 14:44
크아. 찾아다니면, 서울도 구석구석 매력적인 곳인 것 같아요. ^ㅁ^
Commented by 고구마 at 2008/08/06 00:38
나도 어딘지 안다우 거기. 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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